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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때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앞에서 연주를 하고 그래미상을 18번이나 수상한 천재 첼리스트 요요마는 현재 65세이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벌어진 2020년에도 철저한 방역과 격리 절차를 애써 거쳐가며 작은 섬나라 타이완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연주회를 끝까지 해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2018년 8월부터 시작된 “바흐 프로젝트” 때문이다. 첼로 하나 달랑 들고 혼자서 6개 대륙의 36곳을 돌며 “문화가 우리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탐험하고자 기획된 이 프로젝트는 음악을 듣는 장소를 극장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2019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사라져 가는 맹그로브 숲에서 요요마는 첼로 연주를 했다. 아름다운 첼로의 음색은 막다른 곳에 다다른 생태계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위기감을 가녀린 첼로의 선율로 전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상황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위기의 맹그로브 숲을 뉴스로 접한 사람과, 초록의 숲에서 눈을 감고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요요마의 사진을 본 사람과, 실제 그 숲에서 그 소리를 새와 벌레소리와 함께 들은 사람들의 ‘느낌’은 과연 똑같을까? 실제 그 숲에서 무반주로 행해지는 첼로의 가녀린 아름다운 소리를 들은 사람이 요요마의 숲 속 연주회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음악의 선율은 우리에게 ‘생각’ 이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준다.
‘느낌’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우리는 ‘느낌’ 때문에 행복해지기도 불행해지기도 한다. 저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괜히 설레게 되기도 하고 맞은편 친구가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기도 한다. 나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지어주니 날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내가 말을 걸었는데 들은 척도 안 하면 무시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마치 당연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편견이라면 어떻게 할까?
나를 볼 때마다 그가 미소를 지었던 것은 내가 머리를 숙이는 한국식의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가진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너무 무안해서 미소라도 지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믿는 종교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오로지 신에게만 허용되는 행동이었기에 자신을 신처럼 대하는 나의 행동이 너무 무안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내가 말을 걸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아 보인 것도 같은 종류의 오해이다. 한국식으로는 말을 먼저 걸고 쳐다보기도 하는데 이런 말하기 방식을 상대방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문화에서는 말을 걸기 전 반드시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기 때문에 한국말이 서툰 상대방은 내가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조용히 기다려 준 것이었다.
우리가 갖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느낌’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확실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확실한 느낌이 얼마나 왜곡되고 편협한 것이었는지 상대방이 가지는 문화적 차이를 맞닥뜨리기 전에 깨닫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야 한다.
요요마가 6개 대륙의 36곳을 돌아다니며 첼로를 연주하려고 하는 이유는 “가장자리 효과(edge effect)”를 이루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자리 효과란 숲과 사바나처럼 서로 다른 두 서식지가 만나는 경계 지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만나게 되면 생물의 다양성이 나타나고 생명체들이 번성한다.”
(Claudia Kalb, “Bridging cultures and good causes with music.” National Geographic, The Ocean Issue, 05,2021, p.36)
자연의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종들이 만나고 생물의 다양성이 나타나며 생명체들이 번성한다면, 사람들의 각기 다른 문화가 만나는 곳에서 문화는 다양성으로 나타나 다양하게 이해되고 사람들은 더욱 번성하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문화는 그렇게 다른 ‘느낌’을 느끼게 하고 이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문화예술적 경험은 단지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를 검색할 때의 나의 ‘느낌’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어 내가 한 번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나를 발견하는 기회를 줄 수 있다. 이런 문화예술적 경험은 요요마의 첼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길거리 가다가 우연히 들려온 노래 가사가 갑자기 가슴을 파고 들어와 울컥해 본 경험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를 통해 자신이 본 그림자만 진짜라고 믿는 동굴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사람이 동굴 밖으로 한 번만 나와보면 자신이 본 것은 그림자일 뿐, 사실은 동굴 밖에 태양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그림자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 안에서 밖으로 자주 나가지도 못하고 아기 키우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에게 문화예술 경험이란 그런 것이다. 동굴 밖으로 한 번 나가보는 것.
동굴 밖에 나왔더니 ‘나만 갈팡질팡 힘들게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다들 쩔쩔매네...’, ‘내 아이만 자지러지게 우는 것이 아니라 저 아이도 저렇게 우는구나...’하고 느낄 수 있다. ‘내 남편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짜증만 나한테 내는 줄 알았는데 저 애기 아빠도 애기 엄마한테 잔소리를 하고 또 듣기도 하고 그러네...’, ‘아... 맞다. 애기 태어나고 나서 이런 감미로운 음악을 맘 편하게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네..., 흠... 좋다...’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 최소한 주어지기만 해도 오해와 좌절과 피로가 학대로 이어질 경우의 수는 줄어들 수 있다.
다 큰 어른의 행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도 수많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1장에서 든 예들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그런데 하물며 말한 마디 통하지 않는 신생아를 100퍼센트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해가 안 되거나 잘 못 되어서 발생하는 오해는 항상 ‘나쁜 느낌’이나 ‘좋지 않은 느낌’과 결부된다. 이것은 좌절과 분노를 일으켜 스스로에게 또 상대방에게 폭력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나만의 동굴 안에 있을 때는 이것이 오해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다. 나만의 동굴에서 나와봐야만 알 수 있다. 나만의 동굴에서 나오는 제일 안전한 방법이 바로 문화예술적 경험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지 않나? 어디선가 아름다운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귀 기울이거나 소리 나는 쪽을 기웃거리게 되지 않나? ‘아동학대’는 그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혹은 어떤 아름다운 광경도 볼 수 없었던, 동굴 안에 갇혀서 고립되어 사는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좌절과 분노의 불행한 결과이다.
“부모가 직면하는 아이 키우기 힘든 이유 탑 50”을 조사한 2012년의 영국 자료에 따르면 조사에 참가한 4분의 3 이상의 부모들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양육이 훨씬 더 힘들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정말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그들이 꼽은 가장 힘든 4가지 항목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밤에 아예 못 자거나 잠이 부족한 것, 어떻게 해도 그치지 않는 아기의 울음소리, 인내심의 한계, 엉망진창인 집안 등이다. 강의 중 수강자들에게 이 이유를 대면 대부분 육아를 담당하고 있는 주양육자들은 헛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자기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아서 그런다고들 한다.
아기를 가진 가족들은 직업, 나이, 출신 지역, 학력 등을 불구하고 생활의 대부분을 ‘아기’에게 맞추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동굴의 예를 들어보자면 아기가 제일 안쪽에 들어있는 동굴에 그 아기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만 옹기종기 모여있는 셈이다. 만약 그 아기가 첫아기라면 초보 부모와 가족들은 갑자기 커진 책임감과 이미 변해 버린 자신들의 삶에 적응하기도 벅차다. 즉 아기만 바라보고 하루 종일 동동 발을 구르는 그들은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은커녕 다른 동굴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없다.
1세 미만 아기를 키우는 많은 부모들에게서 흔히 듣는 말들은 다음과 같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뭘 잘 못할까 봐 두렵다.”, “잠 좀 자고 싶다.”, “주변 아무도 나를 이해 못해준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익명이 보장되는 온라인상에서는 “얘는 그냥 나를 힘들게 하려고 작정한 거 같다”라는 직접적 호소가 나오기도 하고 우울하다는 표현은 거의 기본으로 등장한다. 나만 동굴에 갇힌 느낌, 도망갈 데가 없는 느낌,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바보같이 느껴지면 어느 순간 그 좌절과 분노는 내 앞에 자주 나타나는 대상을 향해 발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대상은 물건이 될 수도 있고 가족 구성원이 될 수도 있으며 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나도 몰라’, ‘난 더 이상 못해.’라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경우 문제는 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의 경우, 2020년 아사히신문 기사에 의하면 2018년 사망에 이른 아동학대의 40.7%가 1세 미만이며 63%가 생물학적 부모에 의한 것이었다. 부모가 방임해서 일어난 영아사망률은 46.3%로 신체학대에 의한 원인을 넘어섰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2020년 집중 기획된 뉴스 기사에 의하면 아동학대로 숨진 아동의 3분의 1이 1세 미만이며 방임의 비율이 62.2%로 압도적으로 높다. 그리고 2014년을 제외한 2018년까지의 다른 모든 해의 영유아 사망 사건에서, 가해자가 20~30대인 경우가 3분의 2에 달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부분 양육지식의 부족과 아기에 대한 이해 부족과 사회적 정신적 고립감이었다.
(장은주 “부천의 영아기 문화향유 프로그램을 통해 본 생애주기별 예술기획의 사회적 기능”, 문화와 융합, 한국문화융합학회, 제43권 4호, 2021년 참조)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2018년 자료집 2쪽을 보면 문화예술 경험의 가치는 개인의 정체성, 성찰력, 자존감 형성은 물론 사회적 공감, 소통, 포용성, 공동체성의 형성에 있다고 한다. 즉 각자의 동굴 안에서만 고군분투하는 가족들이 중간 마당에 다 같이 나와 이쁘게 반짝이는 태양을 보고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다른 가족들 이야기도 듣고 보고하는 과정에서
‘아! 나만 이러고 사는 게 아니구나...’하는 ‘느낌’을 서로 공유하게 되면 공감, 소통, 포용성 등은 늘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만 못났다’ 혹은 ‘나만 못한다’라는 생각은 부정적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뭘 할지 모르겠고, 너무 못하는 것 같고, 아무리 노력해도 모르겠거나 안될 것 같고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면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내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느 누구’에서 아기도 예외는 아니다.
제5차 세계 교육과학회의에서 소개된 예술이 가진 사회적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예술은 사회문화적 환경의 확실한 현상이며 제한된 사회문화적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2)
사회 구성원들에게 통일감과 연대감을 제공하며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각을 직간접적으로 이끌어 준다.
(3)
당대 문화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차원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다.
(4)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은 사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있다.
(Dixon, T. G. & Chalmers, G. T.(1990). “The expressive arts in education”, Childhood Education, Washington, 67(1), 12-17.; Fernández-Cao, M. L. et al.(2010). “Social functions of art: Educational, clinical, social and cultural settings. Trying a new methodology”, International Journal of Education through Art, 6(3), 397-412.)

부천문화재단 아기공연
페르난데스-카오 등이 10년 동안 진행한 연구결과를 보면 지속적으로 예술경험을 한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더 정확하게 인지하고,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가 흡수하여 상황을 더 잘 견뎠다고 한다. 이 연구결과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 결과가 나이, 출신지역, 성별이나 학력 등에 무관하게 비슷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흡수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넘어서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만약 지역사회가 주 양육자들이 옆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다들 비슷한 입장에서 아기를 자기 옆에 앉히거나 뉘어놓고 아기가 울어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 환경에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실제 육아에 지친 양육자들이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고 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문화예술 경험은 양육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한다.
(1)
같은 상황에 처한 가족들을 보며 양육자들은 통일감과 연대감을 느끼고 고립감을 극복하고 육아 이슈에 대한 직간접적인 자각을 하며 스스로에게 적합한 양육태도 및 방법을 찾을 수 있고
(2)
편안하게 즐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차원의 육아관련 문화를 배울 수 있으며
(3)
이를 통해 육아 현실을 이해하고 육아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을 스스로가 키울 수 있다.
이것이 문화예술 경험이 지닌 사회적 힘이자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