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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지 않고, 미술관에서 그림만 보지 않는다. 햇빛이 실내에 배경이 되도록 신경 쓴 창문부터, 벽에 걸린 액자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담아낸 모습까지. 공간을 채우는 것들로 우리의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지고, 안목은 볼수록 높아지며 삶은 여유를 가질수록 풍요로워짐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 코로나로 이동이 제한되면서 공간이나 장소에 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출과 일몰, 일과 휴식의 시간처럼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인 리듬의 독특한 조화로, 한 장소에 대한 감정은 그 사람의 뼈와 근육에 새겨진다고 하니, 장소에 매료된다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것들에 매료되고는 한다.
그건 누군가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곳 어떤 장소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카페 ‘엘피 갤러리’의 문을 연 순간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은은히 쏟아져 내리던 빛처럼 말이다. 음악이든 고동이든, 고막을 둥둥 울리고 심장을 쿵쿵 두드리며 달려드는 지극히 찰나의 순간 홀린 마음처럼 말이다.
지난 6월 부천시 심곡동 행정복지센터 앞(부흥로 424번길20/2층)에 문을 연 ‘엘피 갤러리’는 MZ세대에게는 인스타 감성 충만한 데이트 장소로,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의 쉼터로 한껏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역 문화예술인 등으로 구성된 뉴트로협동조합이 양주승 대표와 함께 운영하는 이곳에서 앞으로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펼쳐질 예정이다. ‘엘피 갤러리’는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일만여 장의 엘피 음반을 보유한 만큼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의 무한함으로 우리의 상상을 압도한다. 여기에 더해, 소득의 20%는 부천희망재단과 협력해 사회적 공헌 기금으로 전달된다고 하니 의미는 더욱 특별하다.
풍성하고 여유로운 9월 ‘엘피 갤러리’만의 특별함을 담고자 ‘랑’에서도 ‘찰랑이며 반짝이는 부천 공간’으로 ‘엘피 갤러리’를 만나보았다. 계절이 지나는 계절 사이, 아직 어느 계절에 도달하지 못한 간절기 속 날씨는 습했고, 간헐적으로 비가 내렸다. 2층으로 오르는 간판에서부터 반짝거리는 조명, 알전구로 촘촘히 박힌 다섯 글자는 기대감으로 한껏 불을 밝혔다.
나팔형 레트로 축음기가 아로새겨진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백만송이 장미’가 흐르는 공간이 밀려오고, 뮤직 박스 근처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넘실거렸다. 실내는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카페 안쪽 구석구석까지 추억의 007 영화 포스터들이 레트로 감성을 더해주었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실체를 만난 것처럼, 무엇보다 첫인상의 ‘엘피 갤러리’는 감각이 펼쳐지는 공간으로서 삶의 여유와 안목을 키우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예술적 감각과 낭만적 정서가 녹아있는 장소에 있다 보니, 새삼 문화와 예술이 우리 일상에 미치는 영향과 우리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는지, 그 여유로움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작업환경이 상업적인 결과물로 만났을 때, 지역으로 유입되는 유동 인구의 활발한 활동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인구 이동 현상으로 일컬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더는 생소한 단어가 아니듯 말이다.
1964년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의 유입과 새로운 소상공인들이 모여들면서 황폐했던 도심이 활기를 되찾고,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은 한때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그랬듯 지금의 망원동, 연남동, 홍대 입구, 성수동, 문래동에서 을지로까지. MZ세대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는 곳은 장소만 이동될 뿐 이들이 갖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까지 지칭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이, 문화적 감성이 풍부한 동네로 발전하고, 볼거리 가득한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건 어느 면에서 매우 중요하기도 하다. 그 이면에는 원주민들의 의식도 따라야 하고,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이 집중되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엘피 갤러리 내부 (사진=엘피 갤러리 제공)
그런 의미에서 카페 ‘엘피 갤러리’가 심곡동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은 더 중요해졌고, 이곳에서 만난 부천 문화예술인들의 진심은 무엇보다 마음에 남았다. 서양화가 김미정 작가의 진정함은 간절했고, ‘안녕? 베르네!’에서 줍깅으로 환경운동까지 실천하는 최은경 마을활동가의 바람은 투명했고, 김희자 오피니언 리더의 소망은 소박했으며, 황백조 시인 부부의 진실함은 낙관적이며 진지했다. 함께 나누게 된 대화와 그들이 ‘엘피 갤러리’에 전하는 바람을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보았다.
Q. 조용한 분위기를 상상하고 왔는데, 이렇게 많은 분이 계실 줄 몰랐습니다. 이곳에는 자주들 오시나요?
김희자(선생님) - 그럼요. 카페가 오픈하고 지인들과 자주 들르는 곳이 됐어요. 제가 임영웅 팬이라 임영웅이 부르는 노래를 자주 듣고 있어요. 여기서도 대표님께 음악을 신청하죠. 요즘 곡들은 CD로 틀어주시는데, 옛날 노래들은 신청하면 바로 엘피 음반으로 틀어주시죠. 종이에 신청곡을 적고 있으면 정말 70년대 음악다방에 온 느낌이에요. 우리 젊을 때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편안하고 여유로워지니까 자주 오게 돼요.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좋고, 카페도 예쁘잖아요.
Q. ‘엘피 갤러리’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하면 좋을지 기대나 바람, 혹은 아쉬움 같은 게 있으실까요?
김희자(선생님) - 저는 처음 ‘엘피 갤러리’가 오픈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많은 기대를 했답니다. 일만여 장의 엘피판에 대한 소문을 전부터 듣고 있었거든요. 여기 대표님이 손님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세요. 부천의 명소로 오래도록 이곳에 남아, 지금처럼 손님과의 원활한 피드백이 유지되는 그런 곳이면 좋겠어요. 주변 환경에 대해 아쉬움이 조금 있는데, 이런 좋은 장소가 젊은 친구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생겼으면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에요. 소망이라면 아무래도 세대 간 격차가 있다 보니 서로 어울리기가 쉽지 않잖아요. 세대 간 어울림, 공존의 장소로 ‘엘피 갤러리’ 같은 카페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황백조(시인 부부) - 맞는 말씀이세요. 그래도 화려한 번화가보다는 옛 도심에 있어 더 정겨운 장소일 수도 있어요. 사라져 가는 골목이나 길모퉁이 카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걷고, 둘러보다 찾아오게 되는 장소로 말이에요. 젊은 친구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를 접하는 장소로 제격이지만, 요즘이 코로나 시국이라 정말 안타까워요.
김희자(선생님) - 여기 시인 선생님이 양주승 대표님을 위해 지은 동화가 있잖아요.
Q. 어떤 이야기인지 들려주세요.
황백조(시인 부부) - 대단한 건 아니에요. 대표님이 열심히 하시니까. ‘다람쥐 왕자’라고 양주승 대표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동화예요. ‘엘피 갤러리’ 카페가 부천과 심곡동의 문화적 명소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대표님이 음악과 일만여 장의 엘피 레코드에 담긴 애정이 주변에까지 널리 닿아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Q.김미정 작가님은 ‘엘피 갤러리’ 오픈 기념 공공미술 비보이 초대전에 작품(Windmill)이 전시되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작가님에게도 이곳이 특별한 장소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김미정(서양화가) - 네, 영광스럽게도 지난 6월 10일부터 7월 9일까지 한 달간 ‘엘피 갤러리’를 찾는 손님들에게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를 포함해 16명의 작가가 비보이 초대작가전에 참여했는데, 기념되는 일이었습니다.
Q. ‘엘피 갤러리’가 작가님 같은 화가나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특별하겠지만, 지역주민들에게도 특별한 장소를 넘어 친근한 장소로 자리매김하려면 어떤 점을 들 수 있을까요?
김미정(서양화가) - 지역이 살아야 도시가 살고 도시가 발전해야 시민들의 문화 의식도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카페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유럽만 봐도 카페에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예술과 문학을 이야기하고 토론하잖아요. 그런 습관화된 일상이 문화로 자리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거리두기로 모임이 자제된 시기라 무척 아쉽지만, 심곡동에 ‘엘피 갤러리’ 같은 카페가 문을 열게 된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저희 같은 예술가들에게는 문화 전시 공간으로 개방되기도 하니 더욱 반갑고, 한 자리에 모여 조언도 구하고 협업할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만들어갈 조화로움이 카페를 찾는 이웃이나 소문을 듣고 찾게 될 관람객들과도 어우러질 수 있다면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크고 작은 문화 콘텐츠들이 지속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심곡동은 가까이에 시민의 강도 있고 지역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부천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니 더욱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게 되죠.
Q. 엘피 갤러리는 문화예술 플랫폼으로서 문화예술가들에게도 개방된 공간이라고 들었습니다. 마을활동가로서 최은경 활동가님이 ‘엘피 갤러리’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최은경(마을활동가) - 우선 엘피 갤러리 카페가 심곡동에 자리한 게 무엇보다 기뻐요. 대표님이 오랜 시간 수집하고 소장했던 일만여 점의 엘피 레코드가 옛 감성으로 전시돼 있어 개인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의미가 있죠. 시민들에게는 추억의 장소로, 젊은 친구들에게는 부모님 세대의 정서를 경험해보는 새롭고 흥미로운 장소예요.
차와 커피, 맥주 같은 가벼운 음료 판매를 기본으로 하는 공간이지만 양주승 대표님이 다른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수익의 목적보다는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매개로 참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소셜 커뮤니티 공간을 마련하는 바람이 담겨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누군가에게는 상업적 공간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엘피 갤러리’ 대표님은 그걸 문화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고, 레트로 감성의 분위기를 살린 카페로 공공성을 띤 지역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변화시켰어요.
우리 이웃들이 시민협동조합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와서 보고 경험함으로써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아가 좋은 의미의 공동체 모임이 생긴다면 더욱 발전하는 부천시가 될 거라 믿어요.
Q. 최은경 활동가님은 ‘엘피 갤러리’가 가진 장소의 장점을 살려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엘피 갤러리’ 카페가 포용적이고 지역적이기 때문에 지역공동체에 기여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 이웃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이 장소가 무엇보다 중요해졌어요.
최은경(마을활동가) - 물론이죠. 우리가 이용하는 주민복지시설이나 주민자치센터의 커뮤니티 시설은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지만, 주민에 의한 공간으로서의 실질적인 역할이 부족해요.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부족한 게 현실이고, 마을활동가로서 매우 안타깝죠.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그것도 이런 작은 골목에 ‘엘피 갤러리’ 같은 카페가 문을 연 건 정말 반가운 일이에요. 주민들이 알음알음 찾아와 이곳에서 소통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건 정말 중요해요. 우리 마을이 조금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카페 ‘엘피 갤러리’가 더욱 의미 있죠.
제가 몇 년째 아동 돌봄도 하고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마을 활동이라는 게 대면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은데 만남 자체가 어려우니 워킹맘들이나 우리 아이들이 모두 힘들어진 거죠. 이럴 때일수록 자발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필요하고, ‘엘피 갤러리’처럼 옛 정서를 누릴 수 있는 카페에서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봐요. 아니면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지치거나 힘들 때 옛 추억에 잠겨 잠시 쉬면서 나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도 좋고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엘피 갤러리’ 양주승 대표님의 음악에 대한 철학과 지나온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추억이 깃든 장소가 그렇듯, 인간이 인간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한두 가지만이 아닐 것이다. 다채로운 자질이 한 사람 안에 절묘한 비율로 배합돼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그의 매력을 포착하게 된다. 절대 비율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매 순간 자신을 최대치로 끌어다 써보려는 사람의 엄격과 충실함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일만여 엘피 레코드의 수집가로, 부천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서,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생활문화예술인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양주승 대표와 ‘엘피 갤러리’가 기대되는 이유일 것이다.

뉴트로협동조합 양주승 대표(사진=엘피 갤러리 제공)
Q. 양주승 대표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엘피 갤러리(LP Galley) 카페 오픈도 이 자리를 빌려 축하드립니다. ‘엘피 갤러리’ 카페는 일만여 장의 엘피 레코드가 소장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숫자로는 이해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일만여 개를 직접 본 일은 한 번도 없어 그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수많은 엘피판을 수집하기까지 들인 열정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엘피판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을 텐데요, 지금까지 엘피 레코드를 어떻게 수집하게 되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중1 때 처음으로 만난 음악이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제3막 중에 나오는 ‘여자의 마음’이었습니다. 큰형님께서는 마리오 란자의 ‘여자의 마음’을 즐겨 부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따라 부른 게 음악을 좋아하게 된 동기가 됐습니다. 이후 큰 형님이 일본에 다녀오시면서 일본 빅터 사 제품의 전축을 사 오셨는데, 당시 여수에서 전축이 있는 집은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전축이 집에 들어오면서 어머님께서 레코드 가게에서 사 오신 판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영화 주제가였습니다. 1964년 발매 당시 가격이 330원이었는데, 1967년 국민가수 남진의 히트곡 ‘가슴 아프게’ 판도 당시 400원이었습니다. 요즘 음반 회사가 새로 찍어 내는 엘피 레코드는 5만 원 수준일 거예요. 그에 비하면 우스울 수 있는 가격이지만, 1965년 당시 짜장면 한 그릇에 35원 했던 걸로 기억하면 레코드판 한 장의 가격이 굉장히 비싼 시대였죠. 동백아가씨 엘피판은 지금껏 제가 소장하고 있는데,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Q. 누구나 자기 몫의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 하나씩은 갖고 있을 텐데요, 양주승 대표님의 역사는 엘피 레코드와 함께 한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한 개인이 일만여 장의 엘피 레코드를 긴 시간 동안 소장하기도 어렵고, 보관하고 지키는 것도 보통의 열정과 인내로는 쉽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열정은 물론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되는데, 그동안 이런 보물을 어떻게 지키고 유지해 오셨는지 그 동력이 궁금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하면서 서울 청량리역 대왕코너(현 롯데백화점) 음악다방에서 보조 DJ로 시작한 게 레코드를 본격 수집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당시 음악다방에서는 가격 부담 때문에 라이선스 음반이나 원판은 꿈도 못 꾸고 백판이라고 부르는 해적판(200원~250원)을 구입해서 틀곤 했었죠.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구입한 판은 거의 라이선스이거나 오리지널 원판이었습니다. 저만의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현재 ‘엘피 갤러리’에는 레코드는 해적판이 단 한 점도 없어요. 거의 원판이거나 라이선스를 갖고 있어 더욱 가치 있고 음질이 좋습니다.
주변의 지인들을 보면 결혼 예물로 전축을 사고 레코드판을 샀는데 이사하면서 판을 다 버렸다고들 얘기합니다. 판을 버린 것은 자신이 소유한 전축(앰프)이 명품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축이 명품이면 레코드판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이기 때문에 감히 버릴 수가 없는 거죠^^
Q. 지금의 젊은 친구들에게 핫 플레이스 하면 강남이나 홍대를 꼽을 텐데요. 멀게는 70년대, 가깝게는 90년대까지, 중∙장년층에게 핫 플레이스는 명동이나 종로가 아닐까 합니다. 같은 층위를 걷고, 지나왔던 시간 속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어서일까요,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겁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종로나 무교동의 다운타운 무대에서 DJ로도 활동하셨다 들었는데, 아날로그적 감성과 정서가 깃든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청년 시절 저는 종로, 무교동, 그리고 대학가에서 DJ를 했습니다. 당시 다른 DJ들은 신청곡을 해설하고 틀어주었지만, 제 DJ 프로그램은 남들과는 다르게 특별했어요. 시대가 그렇다 보니 70년대 독재정권 아래서 반독재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음악 멘트에도 시사성을 곁들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생들의 데모를 한 달 동안 막으려거든 최루탄을 쏘고, 일 년을 막으려거든 학교 문을 닫고, 3년을 막으려거든 학생들을 군대에 보내고, 10년간 막으려거든 독재정권은 각성하라”는 성깔(?) 있는 멘트로 주목을 받기도 하고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DJ를 하면서 직접 음악 감상실을 운영하는 꿈도 갖게 되었습니다. 차곡차곡 꿈을 키우며 다른 음악실 DJ들과는 달리 프로그램 운영방식에 차별화를 두어 저만의 독자적인 운영방식도 갖게 되었죠. 당시 화제의 인물들을 직접 섭외해서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초대해 음악팬들과 함께 소통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만화가 고우영 선생님이 1977년 미국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만화(미국 만유기)로 펴냈는데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센터에서 팬 사인회를 하던 고우영 선생님을 설득해서 제가 일하는 무교동 음악다방에 게스트로 초대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어요. 당시 다운타운에서 인기 만화가를 초대해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제가 최초였고, 개그맨 이홍열, 서세원, 고(故) 김형곤 등도 프로그램 고정 게스트로 출연할 만큼 특별했어요.
Q. ‘엘피 갤러리’에서 얻는 수익의 20%를 ‘사회적 공헌 기금’으로 전달한다고 들었습니다. 운영에도 참여하고,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각계각층의 오피니언 리더로 구성된 뉴트로협동조합은 어떤 곳인가요?
뉴트로협동조합(New-tro)은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아가는 21세기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모토로 지난해 11월에 창립했습니다. 디지털 음원에 사라진 LP 음악과 클래식 레코드를 소환해 70년대 LP 레코드 문화를 재현시켜 소통문화를 창출한다는 계획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조합원으로는 부천지역 문화예술인을 비롯하여 오피니언 리더 30여 명이 참여하게 되었고, 뜻을 모아 올 6월 10일 ‘엘피 갤러리’ 카페를 창업하게 되었습니다. 뉴트로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사업은 음악·그림·사진과 음원·오디오 등 보급을 위한 사업장 운영, 일자리 창출, 문화 콘텐츠 관련 기획·대관, 장비 대여 및 판매 등 다양합니다.
Q. ‘엘피 갤러리’ 오픈 기념으로 ‘공공미술 비보이 초대 작가전’에 이어 최근 ‘007 영화 25편의 포스터 전’까지 개최했습니다. 누군가의 꿈을 현실로 이뤄내는 게 생각처럼 되는 일은 아닌데, ‘엘피 갤러리’를 문화예술인들의 열정과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해주신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공간을 기획하게 되신 계기가 있을까요?
엘피 갤러리가 위치한 시민의 강 일대는 부천의 원도심으로 30~40년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원 도심 역사에 비해 지역주민들이 체감하고 누릴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 게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서비스를 매개체로 문화 취약계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지역주민이 참여하고 소통하는 소셜 커뮤니티 공간을 통해 지역 상권의 활성화가 필요했어요. 시민의 강 인근에 ‘엘피 갤러리’ 둥지를 틀게 된 이유도 그것이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엘피 갤러리’ 공간 활용의 극대화였고, 차를 마시는 공간을 확장해서 음악을 감상하고 지역문화 예술인들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다면 일석삼조라고 판단했습니다. 비보이 초대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반응도 좋았고, 이성주 작가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팔리는 성과도 거뒀으니 출발이 좋은 셈이죠.
한 달간 열린 007시리즈 포스터 전은 영화팬들의 인기가 좋아 현재 연장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9월에는 ‘가을을 부르는 오카리나’ 음악회(이미경-정소영 듀엣)를 비대면으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 중계합니다.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힐링 음악회’가 될 것입니다.
Q. 의미 없이 샀는데, 그 가치가 돋보였던 것들이 있듯, 일상이든 영화에서든 못이 튀어나오듯 의외성을 툭툭 내보이면 이야기가 풍성해지잖아요. 보석을 발견하듯 엘피 레코드를 하나씩 모으셨으니 모두 하나 같이 아끼는 것들일 테지만, 그래도 이 중 대표님이 아끼는 보석 같은 음반이 있을까요?
‘베사메무쵸’ 노래 다 아시죠? 스페인 노래인데 국내에서는 고인이 된 현인, 안드레아 보첼리, 샹송 가수 질리오라 칭케티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영국의 록밴드 비틀스가 1962년 12월 말 독일 함부르크 스타클럽에서 녹음했는데, 1977년 레코드로 발매된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듣고 상상했던 ‘베사메무쵸’와는 전혀 다른 로큰롤 버전으로 제가 아끼는 음반입니다. 또 하나는 이탈리아 출신 테너 성악가 카루소의 음반으로 1977년 영국에서 출시된 명반입니다. 그리고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출간한 에디트 피아프 전집(10EA)과 1967년, 1989년 내한공연을 가졌던 브랜다 리의 He sure to remember me를 꼽을 수 있겠네요.
Q. 얼마 전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우리가 사랑한 그 노래, 새 가수’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7080 세대의 노래를 젊은 세대가 새롭게 구성해 부르는 경연 프로그램으로 ‘엘피 갤러리’와 결이 같은 레트로 감성의 정서를 담고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표님이 시대 흐름을 잘 읽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 ‘엘피 갤러리’는 어떤 의미이며, 앞으로 ‘엘피 갤러리’를 어떻게 꾸려 가실지 궁금합니다.
LP 레코드는 음악적 기록일 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기록물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중후반 CD가 등장하면서 사라질 것 같았던 LP가 디지털 스트리밍 시대에 다시 부활하고 있는 가운데 레코드는 퇴보가 아닌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뉴트로(New-tro) 협동조합’은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Retro)에 New를 융합한 '뉴트로'(New-tro)를 통해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아가는 '21세기 온고지신(溫故知新) 문화'를 창조하여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됐습니다.
‘엘피 갤러리’가 문화서비스의 매개체가 될 수 있도록, 문화 취약계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지역주민이 참여하고 소통하는 소셜 커뮤니티 공간에 맞게 최대한 활용하는 게 목표입니다. 더불어 지역 상권의 활성화를 꾀하는 것도 숙제로 남았네요.
‘엘피 갤러리’가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를 따져보았을 때, 첫째는 음악과 미술작품을 매개로 시민들에게 생활 속 문화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활문화예술 플랫폼’ 기능입니다. 두 번째로는 '코로나19'로 스트레스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치유와 소통의 공간’이 될 테고요. 세 번째로는 ‘음악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일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부천시에는 유럽 도자기박물관을 비롯하여 수석박물관, 교육박물관, 활박물관, 옹기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이 있지만, 음악박물관이 없는 게 아쉬웠습니다.
‘엘피 갤러리’는 일만여 장의 다양한 장르의 LP 레코드를 보유하고 있어요. 클래식 음반을 비롯한 국악, 판소리, 팝뮤직, 샹송, 칸초네, 라틴음악, 영화음악, 애니메이션 음악, 세계 민속음악 레코드를 비롯해 아날로그 음향기기, 진공관 앰프, 오픈릴 녹음기 등 수억 원 상당의 자산을 보유한 만큼 박물관 수준이라 자부합니다. ‘엘피 갤러리’가 음악도서관 역할로 시민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고, 부천을 넘어 전국적으로 시민들의 음악적 욕구를 충족시켜 드리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밖에도 ‘엘피 갤러리’에서는 이유경, 김태전 도예 작가가 직접 불가마에서 구워낸 머그잔(Mug Cup)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움을 학문으로 따로 공부했지만, 지금은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경험이 중요해졌어요. 그런 시대로 바뀌었어요. 전시장에서만 감상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부천이 생활문화예술도시인만큼, 실생활에서 직접 사용해보고 체험하는 게 중요하죠. ‘엘피 갤러리’가 그 역할에 일조할 생각입니다. 생활문화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열린 장소’로 지역 도예 작가가 제작한 머그잔을 사용해 카페의 품격을 높이고 고객들이 도예가의 예술성을 찻잔에서 만날 수 있는 것도 한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엘피 갤러리’가 오픈과 함께 ‘2021부천시 단비기업’ 공모에 당선됐어요. 우수상 수상으로 문화 프로그램 예산지원을 받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이제는 여유를 갖춘 중⋅장년층에는 추억의 쉼터, MZ세대라 부르는 젊은 층에는 뉴트로 열풍에 맞춰 다가온 레트로 감성의 데이트 장소로 새로운 문화 바람을 불러일으켜 낭만이 함께하는 청춘의 핫 플레이스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요즘 스마트폰 등 SNS 활성화로 카페 등 만남의 장소에서는 대화가 실종됐다고 합니다. 만나면 대화보다는 스마트폰에 몰두해 인터넷 검색과 카톡에 열중해 있어요. 하지만 ‘엘피 갤러리’에서만큼은 음악으로 소통하고, 추억을 이야기하고, 낭만을 즐기며, 잠시나마 여유를 찾는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엘피 갤러리’는 작은 위로를 건네는 장소 같았다. 때로는 힘들었을지라도 그래도 좋았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많은 엘피판 속에 담긴 건 누군가의 음악이고 누군가의 이야기다. 이제는 세월이 내려앉은 얼굴 위로 떠오른 청춘은 여전히 젊었고 온전히 빛났다. 그 시절 누렸던 낭만이, 피 끓는 청춘이, 치열했던 삶이 비록 고단했을지라도,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잠시나마 그들을 다독이며 어루만져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행복했노라고, 잘 지내왔노라고, 가만히 손 내밀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이루던 다짐이 오늘의 여유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 그리 크지 않다. 그저 골목 특유의 레트로한 분위기에 맞게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친구처럼, 누군가와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장소로서 이만큼의 매력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바쁠 때일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버거운 일상을 벗어나 잠시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잠시 쉼, 여유로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사람 냄새 물씬한 골목에서, 정교한 기계음이 아닌 가끔 치직거리는 음이 들릴지라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음악 한 소절이면 더할 나위 없다. 푸른빛 도자기 찻잔에 담긴 차를 음미하며, 추억이 돼버린 아련한 감성을 우리며,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노래를 들으면서 말이다.
사진 : 박정윤, 엘피 갤러리